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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95)~27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266
인문과학연구
27권0호(2018년 08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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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豊壤趙氏) 증장령공파(贈掌令公派)는 중종반정을(中宗反正) 계기로 한양에(漢陽) 기반을 마련하면서 현재 도봉구(道峰區)의 방학동에 해당하는 해등촌에(海等村) 선영(先塋)을 마련했다. 중종반정의 핵심 공신(功臣)들과 인척 관계를 형성했던 풍양조씨 증장령공파는 한양의 청교(淸橋)에 주거 기반을 마련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청교조씨(淸橋趙氏)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사대부 사회에서의 폭넓은 교유를 기반으로 하여 청교조씨는 노론(老論) 측 인사들과의 혼인은 물론 소론(少論) 측 인사들과도 중첩적인 관계망을 형성했다. 노소론을 넘나드는 혼맥(婚脈)과 함께 정치적으로 노소론의 어느 한 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은 채 균형 있는 정치 감각을 보였던 청교조씨 구성원들은 청교와 해등촌을 기반으로 하여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사대부 사회에서 국중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문의 성장은 이후 영조대(英祖代) 탕평정치의 정치 현실에서 주도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정치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Pungyang-Jo Clan(豊壤趙氏) Jeungjangnyeonggongpa(贈掌令公派) laid the groundwork in Hanyang(漢陽) with Jungjong-banjeong(中宗反正) and prepared a family burial ground in Haedeungchon(海等村) now Banghak-dong, Dobong-gu. Pungyang-Jo Clan Jeungjangnyeonggongpa made the family relationship with a meritorious retainer in Jungjong-banjeong and prepared the housing laying the groundwork in Chunggyo(淸橋). They were called Chunggyo-Jo Clan(淸橋趙氏) based on the political growth. Chunggyo-Jo Clan made the overlay network with Noron(老論) and Soron(少論) based on wide range of companionship in gentry society. Chunggyo-Jo Clan had got related by marriage with Noron and also they had got related by marriage with Soron. Chunggyo-Jo Clan did not lean to one side with Noron and Soron in the field of reality of politics. They showed balanced political sense by marriage network and political scene in the late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y achieved the best growth in the family stand on the basis of gentry society from the second half of the seventeenth century to the former half of the eighteenth century. And the growth of Pungyang-Jo Clan Jeungjangnyeonggongpa let them to play a key role in the balancing politics of the King Yeongjo, the 21st King of Joseon.

2<기획논문 1 | 조선시대 풍양 조씨 가문과 도봉구> 18세기 관료 조현명의 정치적 공간, 해촌(海村)

저자 : 이민정 ( Lee Minjung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9-6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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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세기 관료 조현명의 별서가 위치했던 공간인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해촌)을 조현명의 정치적 공간으로 규정한 논문이다. 본 논문의 Ⅱ장에서는 조현명이 해촌에 별서를 마련하고 그곳을 이용했던 양상을 설명하였고, Ⅲ장에서는 조현명의 별서 이용 행위의 의미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하여 해촌의 별서가 조현명에게 정치적 공간의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다는 해석을 Ⅳ장에서 진행하였다. 더 나아가 도성 밖 경기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한 관료들의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추론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확대하였다. 조선후기 관료들은 도성과 가까운 경기도 일대에 별서를 마련하고 주거와 풍류 휴식 등의 용도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별서의 이용 방식은 그동안 탈정치적이고 탈속적인 '은거'의 경향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조현명의 해촌 별서 이용 양상과 그 의미를 분석함을 통하여 당대 관료들의 별서가 가지는 의미는 지극히 정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은거' 라는 행위가 탈정치적이거나 탈국가적인 개념이 될 수 없음을 살펴볼 수 있다.


This study is a paper that defines the space of Haedeungchon-myun Yangjumok Gyeonggi-do where Byeolseo of Cho Hyun-myung, a bureaucrat in the 18th century, was located as a political space. To this end, this study explains the aspect of setting up Byeolseo of Cho Hyun-myung and its use and aims to examine the meaning of space to Cho by analyzing the meaning of such an act. Furthermore, this study expands the discussion in a way of inferring the political meaning of the act of bureaucrats who established the base in Gyeonggi province, outside of the capital city. The bureaucrats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set up Byeolseo in Gyeonggi province close to the capital and used it for residence and relaxation. The use of Byeolseo has been understood in the tendency of seclusion, which is post-political and post-secular. However, according to the analysis of Cho's use of Byeolseo and its meaning, it can be said that the meaning of Byeolseo of the bureaucrats in the past was notably political. In addition, this study reveals that the act of seclusion cannot be seen as a concept of post-political or post-national.

3<기획논문 1 | 조선시대 풍양 조씨 가문과 도봉구> 신정왕후 도봉 별서('조대비 별서')의 연원과 역사적 의미

저자 : 이민아 ( Lee Min-ah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69-10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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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도봉서원으로 가는 초입에 위치한 광륜사는 과거 '조대비 별서', 즉 신정왕후의 별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봉 별서는 본래 안동 김씨인 김보근 소유였다가 매매 또는 양도 등의 절차를 통해 그 소유권이 신정왕후에게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신정왕후는 아버지 조만영의 선영지인 춘천지역에 별서를 마련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비교적 자신이 거처하는 궁궐과 가까우면서 풍양 조씨 묘역과 세거지가 있는 도봉산 자락에 별서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도봉 별서는 고종의 부인인 엄비가 머무르는 등 왕실 여성의 공간으로 활용되다가, 식민지기 이후 별서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 철종 재위 후반기까지 김보근 소유였던 도봉 별서가 고종대에 신정왕후의 별서로 활용되는 과정은, 당시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신정왕후의 세자빈 간택으로 외척이 된 이래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의 독단적인 권력 농단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던 남편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신정왕후와 풍양 조씨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이후 신정왕후의 아들 헌종의 집권으로 풍양 조씨는 다시 안동 김씨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나, 헌종이 후사 없이 요절하는 바람에 결국 안동 김씨에게 권력을 완전히 빼앗겼다. 신정왕후는 철종 사후 흥선대원군과 함께 고종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흥선대원군의 권력 독점으로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도봉 별서는 이러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신정왕후의 공간이 되었고 또 활용되었다. 신정왕후의 도봉 별서, 즉 '조대비 별서'는 19세기 정치적 격변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신정왕후가 권력에서 배제된 뒤 본격적으로 활용했던 '아픔'의 공간이자, 치열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로소 한발 물러나 휴식을 즐기던 '안식'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정왕후의 죽음 이후 도봉 별서를 이용했던 엄비 역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격변의 시기, 아들 영친왕이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곧이어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비에게도 도봉 별서는 아들 영친왕과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머물던 '아픔'의 공간이자, 말년에 쉼을 얻었던 '안식'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도봉산의 풍광을 품고 있는 도봉 별서는 신정왕후와 엄비 등 고종대 왕실 여인들의 영광과 아픔, 그리고 안식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Gwangryunsa Temple located at an entrance to Dobongseowon is known as a vacation home of Empress Sinjeong long ago. Although Empress Sinjeong who conducted Sooryeomcheongjeong as soon as King Kojong acceded to the throne attempted to continue the reform politics initiated by Crown Prince Hyomyung, she was drastically isolated from the political authority, as she withdrew Sooryeomcheongjeong, in 1866. King Kojong just tried to treat Empress Sinjeong as the Grandmother of the King, by giving an honorific title and the Jinchan ceremony to her who did not have a distinct effect on politics, except that she supported his direct government system. It is supposed that Empress Sinjeong spent her lone later years, while sometimes having a rest in the vacation home built on Mt.Dobong, until 1890, when she died after withdrawal of Sooryeomcheongjeong. The Dobong vacation home was originally owned by Kim Bo-geun belong to the Kims'family of Andong. The ownership of it might be transferred to Empress Sinjeong through a procedure such as sales or a transfer. She seemed to establish the vacation home on Mt.Dobong foot on which the living of generations and the graveyard of the Johs' family of Pungyang, and which was also relatively close to the palace in which she lived, since it was actually difficult for her to build it in Chuncheon areas, the family burial ground of Joh Man-yeong, her father. Then, the Dobong vacation home was used as a space for royal women: King Kojong's wife, Empress Um also stayed there. However, it completely lost its function of a vacation home, as the temple was built in it after 1980s.

4<기획논문 2 | 한국 근·현대사 속의 덕성 100년 ( Ⅰ )> 서양과 한국의 근대여성운동, 그리고 근화여학교

저자 : 한해정 ( Han Hai-jung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03-13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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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근화여학교를 통해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일면을 평가했다. 이를 위해 우선 서양의 제1기 여성운동을 영국과 미국의 사례로 살폈다. 이 시기 서양의 여성운동은 교육, 재산권, 사회개혁, 참정권 등에 관심을 두고 진행되었다. 특히 세기전환기경 참정권 운동을 펼쳐간 여성운동가들은 '신여성'에 속했다. 식민지 한국에서도 '신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기독교관련 학교교육을 받거나 외국유학을 한 여성들로 한국의 제1기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무엇보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는 교육과 사회개혁을 추구한 여성운동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까지 신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때이다. 차미리사가 이끈 조선여자교육회는 이때 만들어진 신여성들의 조직이다. 여기서 운영한 야학은 근화여학교(1925)로 발전해 또 다른 신여성들을 배출했다. 조선여자교육회나 근화여학교와 관련된 신여성들은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근우회처럼 한 조직으로 통합을 꾀하면서 여성운동을 전개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하며, 식민지에서의 시대인식을 갖고 가정을 넘어 사회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women's movement of the first stage in the West and Korea. In England and the U. S. A, the women's movement was focused on the education, social reforms, the property rights and political rights etc. At the turn of the century, the 'New Women' campaigned the movement for suffrage. The 'New Women' in the colonial Korea also led the women's movement. They were generally educated in missionary schools.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activities of the New Women were noticeable. Among the New Women there were educators, social reformers and socialists. For example, the Joseon Women Education Association was established by the New Women. Cha Melissa was a leader of the association. She and teammates ran a night-school(1920). It has developed into Kunwha Women's School(1925), and the school has bred up the New Women. The members of the Joseon Women Education Association and the Kunwha Women's School were different ideologically. But in the 1920s colonial Korea, they did the movement for the women's freedom together(ex: Kunuhoe). They realized their position. And they tried to expand the activities to improve the women's social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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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여성지도자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가 세운 근화여학교의 음악활동을 중심으로 식민지조선에서 여성을 사회구성원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음악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는 데 초점을 둔다. 차미리사와 근화의 음악적 역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전근대적 가치관에 놓인 여성들의 자아를 고취시키고, 둘째, 학생들의 취업까지 고려하여 전문적인 음악교육에 앞장섰으며, 마지막으로 학교 재정확충을 위해 수준 높은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차미리사가 근화에서 수행한 음악활동을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안에서 해석하여 근화가 대표적인 여성교육기관으로서 조선 여성의 근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다.


This article discusses the musical activities of the women's leader Melisa Cha (1879-1955) and Geunhwa Women's School founded by her, concentrating on the role played by music in nurturing women to grow as members of society in colonial Chosun. Cha and Geunhwa School employed music largely for three objectives: first, they attempted to empower women, surrounded as they were by pre-modern ideologies, to develop their own sense of the self; next, they offered a professional musical education with a view to enhancing the students' employability; finally, they hosted quality musical concerts to solidify the school's finances. By offering an interpretation of Melisa Cha's musical activities at Geunhwa in terms of their contemporary socio-cultural significance, this research reveals the part Geunhwa played as a leading institution of women's education in modernizing the women of Chosun.

6<일반논문> 조선후기 수선화의 유행과 쇠퇴

저자 : 윤지안 ( Youn Ji-an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55-205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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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사회문화를 특징지을 수 있는 개념 혹은 사회 현상들이 있다. 京鄕分岐, 京華士族, 眞境, 北學, 燕行, 癖과 癡, 雅會 등이 그것이다. 이 개념 혹은 현상들은 京 즉 도성 한양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조선후기 京鄕의 학문·경제적 격차가 날로 심화되어 갔으며, 한양을 근거지로 하는 지식인들의 학문교류는 당파와 학파를 뛰어넘었을 뿐만 학문탐구의 대상을 다양화해갔다. 최근 경화사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들의 취미, 癖·癡에 기반한 학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조선후기 사회·문화사는 그 외연을 확장시키며,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조선후기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경화사족들의 화훼완상 취미이다. 그 중에서 '수선화'는 단연 특이하고 독보적인 존재이다. 조선후기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경화사족의 수선화 선호는 이미 선행연구가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 수선화 재배 풍조 선행연구에 일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경화사족(조선인)들이 왜 그리도 유독 수선화라는 품종에 집착하였고, 끊임없이 연행을 통해 수입할 수밖에 없었는가·” 수선화 애호를 기존 연구 성과와 같이 단순 웰빙문화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또한 “그 많던 수선화는 언제 우리문화에서 사라지게 되었는가·”이다. 게다가 '수선화' 라는 품종에만 국한해서 바라본다면 경화사족의 소비적이고 과시적인 측면만 관찰되는 반면 화훼지식의 축적과 그 한계와 같은 문제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경화사족들이 유독 수선화에 대해 흥미를 느낀 배경과 그 이전 수입한 화훼들과 달리 수선화를 끊임없이 수입한 이유, 마찬가지로 수선화가 어느 순간 한국 사람들의 인식에서 사라진 배경 등을 파악하는 것에 이 논문의 목적이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조선 후기 '수선화'가 가진 취미 혹은 癖癡 현상을 규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There are concepts or social phenomena that can characterize social cul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Gyeonghyangboongi, Gyeonghwasajok, Jingyeong, Bukhak, Yeonheng, Byeok and Chi, and Ahoe. These concepts or phenomena occurred mainly in Gyeon, namely Doseong Hanya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academic and economic gap in Gyeonghyang deepened, and the exchange of intellectuals based on Hanyang went beyond factions and schools, and thus diversified the subject of academic inquiry. In recent years, studies on their hobbies based on Gyeonghwasajok and scholarship based on Byeok and Chi have been actively developed, and the social and cultural hist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has expanded its scope and helped explain the multi-layered and three-dimensional hist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One of the examples is Gyeonghwasajok's hobby of flower appreciation. Among them, 'Daffodil' is a unique and unparalleled existe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Gyeonghwasajok's preference for daffodil, which is centered on Hanyang, has already been well described in previous research. However, there are some questions about the cultivation of daffodil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y did Gyeonghwasajok(Korean people in the Joseon Dynasty) obsess over the cultivation of daffodils varieties and constantly import them through Yeongheng?” And “When did such many daffodils disappear in our culture?” Moreover, if we look only at 'Daffodil' varieties, the wasteful and ostentatious aspects of Gyeonghwasajok are observed, whereas the accumulation of flower knowledge and its limitations are not clearly seen.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grasp not only the background of Gyeonghwasajok's particular interest in daffodils and the reason for continuous import of daffodils, unlike the previous imported flowers, but also the background of the disappeared daffodils from Korean people's perception at one point. Through this process, it is possible to identify the hobby or ByeokChi phenomenon of 'daffodils'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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